63빌딩
80년대 고속 성장의 상징물이자 서울의 랜드마크 건물인 63빌딩. 한국은 70,80년대에 걸쳐 고속 성장을 하게 되지만 그것을 외부에 드러내기 위한 랜드마크가 없었다. 그때 지어진 것이 63빌딩으로 공사비 1청800억 연인원 100만명이 참가해 완성되었다.
85년 완공당시 지상 60층 + 지하3, 실제로는 60빌딩이 되어야 하지만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던 이케부쿠로의 선샤인 ’60’보다 커보이려던 의도때문에 63빌딩으로 불리게 되었다.
서울 사대문과 사소문
-사대문(인, 의, 예, 지) :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숭례문(남대문), 숙정문(북대문)
사소문 : 혜화문(동북쪽, 동소문), 광희문(동남쪽, 남소문), 소의문(서남쪽, 서소문), 창의문(서북쪽, 북소문)
실제로 모두 문의 기능을 하던 것은 아니고 풍수지리적 이유로 만들어 놓고 거의 열지 않았던 문도 있다.
돈의문과 숭례문이 붙어 있는 이유는 정남 방향에는 남산이, 정서 방향에는 인왕산이 있기 때문이다. 숙정문도 상황은 비슷하지만 실제로 사용하지 않고 비상시에만 열어두던 문이라 북악산에 그대로 위치하게 된다.
동대문 – 흥인지문
동대문만 네글자인 이유는 풍수상 한양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의 지세가 백악산, 인왕산, 남산에 비해 약해, 기운을 높이는 뜻에서 산맥을 뜻하는 之자를 덧붙인 것이다. 유일하게 외벽에 옹성을 둘러 적의 침입을 이중으로 방어하는 구조
서대문 – 돈의문
태조 때 다른 성문과 건축되었다가 태종 때 돈의문을 폐쇄하고 그 남쪽에 ‘서전문’이란 문을 내었고, 세종 때 다시 이를 폐쇄하고 지금의 자리에 새로 돈의문을 세웠다는 복잡한 역사가 있는 문. 게다가 임진왜란 때는 문루가 파괴되고, 숙종 때 이를 복원하였지만 1915년에 전차 궤도 복선화 사업 때문에 철거당함. 4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미복원 상태로 원래는 복원 계획이 있었으나 현판 말고는 복원 근거 자료가 전무하다는 의견으로 현재로서는 복원이 무산되었다는 게 중론
남대문 – 숭례문
서울 성곽의 문 중 가장 웅장하고 규모가 커, 서울의 랜드마크 역할을 해왔다. 현판은 세종대왕의 형인 양녕대군이 썼는데, 다른 문과 달리 글자를 세로로 썼다. 일반적으로 한강 건너 관악산의 화기를 억누르기 위해 현판을 세워 달아 맞불로 도성을 보호하려 했다는 설이 받아들여지고 있고, 그 외에도 귀한 손님이 드나드는 문이라 서서 맞이하는 예의를 나타내려 했다거나 하는 등의 추측이 있다.
북대문 – 숙정문
악산 동쪽 고갯마루에 자리 잡고 있어 연결된 길이 없기에 문으로서의 용도가 약했고, 게다가 태종 대에 경복궁의 좌청룡 지맥을 보존하여야 한다는 이유로 늘 폐쇄되어 있어야 했다. 다만, 가뭄이 심할 때는 음의 기운을 받아들이기 위해 숙정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았다고 한다. 성곽 순례길로 최근 주목을 받고 있음
동소문 – 혜화문
혜화문은 여진 사신이 통과하는 길이기도 했기에 규모가 큰 문루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이 조공을 바치다 청을 세운 후 자신들의 길을 서대문으로 바꾸면서 문의 관리가 졌다. 그래서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문루가 파괴된 것을 수리하지 않고 있다가 영조 대에야 이를 중건.
남소문 – 광희문
청계천의 수구와 가까워 ‘수구문’으로 불리거나, 이 문으로 시체가 많이 나간다 하여 ‘시구문’이란 으스스한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는 문
서소문 – 소의문
도성 내의 시체는 광희문과 소의문으로만 나갈 수 있었다. 게다가 소의문 밖에는 조선시대 죄수들을 처형하던 사형장이 있었다
북소문 – 창의문
작업 때는 열어두었기에 숙청문보다는 대우가 좋은 편이었지만, 그때를 제외하면 숙청문과 함께 폐쇄되어 있었다. 인조반정군 이 문을 통해 들어와 반정에 성공 창의문은 영조 때 오늘날의 형태를 갖춘 이후 현재까지 보존되었기에 다른 곳의 문루를 복원할 때 고증자료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