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토루

중국어로 투러우, 흙으로 만든 집이라는 뜻. 중국 푸젠 성 등지의 산악지역에서 보이는 주거 형태.12세기 이래 중국 남부로 이주해 온 객가(하카)족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20세기에도 건축되었다. 1980년대 CIA가 위성 사진을 보고 핵미사일 기지로 착각했다는 일화도 있다. 영화 뮬란에서 어렸을 때 뮬란이 살던 곳으로 나온다. 허나 중국 남북조시대(420~589년)의 후아 뮬란이 12세기에 처음 지어진 형태의 집에서 살았을리가 없으니 허구이다.

By Gisling – Own work, CC BY-SA 4.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3106129

참고

[세계문화유산] 중국 샤먼, 전통가옥 `투러우` 를 만나다

홍문연

또는 홍문의 연회. 기원전 207년 12월에 진나라가 멸망한 후 초한쟁패기 직전에 진나라의 수도 함양근처의 홍문(鴻門) (현재는 섬서성 서안시 임동구 홍문보촌) 이라는 곳에서 있었던 사건. 초한지의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장면이다

홍문연은 항우가 유방을 죽이기 위해 마련한 술자리였다. 당시 천하의 형세상 연회에 가도 죽고 안 가도 죽는 상황에서 유방은 장량 등의 건의에 따라 예물을 지니고 홍문연, 아니 죽음의 술자리로 향한다.

항우가 홍문연에서 유방을 죽이는 것은 말 그대로 손바닥 뒤집기만큼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항우는 정작 유방을 죽이지 못했다. 아니 죽이지 않았다. “장차 큰 화근이 될 정적”이라는 책사 범증의 충고도 무시한 채 유방을 살려서 돌려보냈다.

홍문연은 다음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초한지 – 천하대전

하카(객가)민족

객가(客家, Guest Family People, 이름 자체가 손님이라는 뜻이다. 중국 남부에 주로 거주하는 이주민들로 일반적으로 토지의 소유가 어려웠기 때문에 유통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교직에도 많은 사람들이 종사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중국의 유태인’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집단 방어가 가능하고 폐쇄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토루에서 주로 거주했다. 중국 남부에서 생활하다가 대만으로 다시 이주한 시기는 청나라 건국시기이다. 대만인구 10%라고 하카족이라고 하며 그중에서 먀오리지역은 60%가 하카족이다. 대표적 인물로 싱가폴 초대 총리인 리콴유가 있다.

참고

혹로족

혹로(福佬, Hoklo)족. 타이완 인구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민족. 하카족과 마찬가지로 고유 언어인 Hokkien을 가지고 있다.

참고

자유냐 돈이냐, 기로에 선 대만

Hoklo People – 영문 위키

도르곤

청의 초대황제인 누르가치의 14남.

섭정왕 도르곤의 급사에 관한 수수께끼

https://m.blog.naver.com/hiid2003/140010949587

근래에 흔히 보는 화려한 청(淸)나라의 의상들이 활보하는 중국 근대사극을 보다보면 참 중국이 저런 1/10도 안되는 이민족(異民族)에게 300여년 통치 당하는 거 보면 오늘날 하는 일련의 행동들이 우습다. 변발(辮髮)한다고 머리까지 슥 밀어버리고 긴 호복(胡服)을 입으면서 연기하는 중국 한족(漢族)의 배우들은 저 산해관(山海關)을 지키던 오삼계(吳三桂, 1612~1678.10.2)를 씹어도 풀리지 않을 것이다.

산하이관(山海關)은 요동총병(遼東總兵)이 진주하면서 만주에서 수도 베이징(北京)으로 들어가는 길을 차단하는 매우 중요한 요지 중의 요지였다. 이 곳을 지키는 자는 그만큼 나라의 신뢰가 깊고 높은 지위를 가진 가문출신에서 나왔다. 오삼계도 진저우(錦州)총병관의 아들로 태어나 가문 덕에 출세해서 이 산해관을 지키는 중책을 맡은 것이다.

당시 만주는 만주족(滿洲族)이 흥궐하여 처음에 금(金)을 세우더니 이제는 청(淸)이라 이름을 고치고 산해관 위쪽의 영토는 모조리 점령해 버린 상태였다. 이에 전전긍긍하던 명나라는 이 산해관을 보루로써 열심히 지키며 팽팽한 대치상태를 만든다.

명나라가 약간 안심할 수 있었던 것은 청나라의 호전적인 황제 태종(太宗) 홍타이지(皇太極)가 죽어 그의 어린 아들인 세조 순치제(世祖 順治帝)가 즉위한 터라 어린아이가 금방 넘어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고 더구나 어린 황제의 섭정(攝政)이 두 명이라 서로 권력싸움에 몰두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만주에서 발흥하고 있었던 청나라의 건국자는 누르하치[奴兒哈赤(노아합적), 1559~1626.9.30]로서 성은 아이신줴뤄[愛新覺羅(애신각라)], 시호는 처음에 무황제(武皇帝)였는데 나중에 중원을 장악한 후 고쳐서 고황제(高皇帝)로 묘호는 태조(太祖)로 한 만주족의 신앙과도 같은 존재다. 누르하치는 전쟁 중에 부상으로 전사하다 시피 했고 그의 8자인 태종(太宗 文皇帝 1592~1643) 홍타이지가 후계자가 되었는데 그는 대단히 용맹한 인물이었다. 후방에서 골치를 아프게하는 조선을 먼저 쓸어버리고 항복을 받아낸 후 이제 산해관을 넘어 중원으로 갈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덜커덕 죽게 되자 결국 어린 아들을 두고 고대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의 역할을 해 줄 섭정(攝政)을 지명하게 된다.

고대 주나라의 무왕이 요절하자 그의 어린아들 성왕을 보좌한 것은 주공과 소공이라는 숙부들이었는데 그들은 사심 없이 성왕을 도와 천년사직을 보존한 고대 중국의 성인들이라 불린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황제의 근친이 사심 없이 어인 황제를 돕는다는 건 그다지 중국역사에 거의 전무했다. 다들 자신의 욕심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섭정 중 한명인 예친왕(睿親王) 도르곤[多爾袞, Dorgon, 1612~1650]은 태종이 신임할 만한 동생 중 하나였다. 그는 태조 누르하치의 14번째 아들이었고 청나라 건국에 공을 세워 예친왕에 책봉되었는데 아무리 황제의 형제라도 파격적으로 친왕(親王)이 된 것은 이레적이었다.

누르하치는 자식이 많기로 유명했는데 16명의 어머니가 다른 아들들이 있었고 후계자 태종은 팔남 이었다. 만주족은 한족처럼 무조건 장남이 승계 받는 풍습보다는 능력 있는 자가 선출되는 관례가 있어 친척들이 모여 훌륭한 이를 추천하여 그 부하가 되는 것이 만주족을 강성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만주족은 황제의 형제라고 해서 무조건 작위를 주는 한족과는 달리 철저히 능력본위였다. 그 예를 누르하치 자식들을 본다면 장자 저영(禇英)은 죄를 지어 바로 사사 당했고 차자 대선(代善)은 예친왕(睿親王), 삼남 아배(阿拜)와 사남 탕고대(湯古代) 그리고 육남 탑배(塔拜), 십자 파포해(巴布海)는 별다른 공이 없다고 진국장군(鎭國將軍), 오자 망고이태(莽古爾泰)와 칠자 아파태(阿巴泰) 그리고 십자 덕격류(德格類)는 패륵(貝勒), 구자 파포태(巴布泰)는 진국공(鎭國公), 십이자 아제격(阿濟格)은 영친왕(英親王), 십삼자 뢰모포(賴慕布)는 봉은장군(奉恩將軍) 밖에 주지 안았고, 십오자 다택(多澤)은 예친왕(豫親王), 십육자 비탕과(費湯果)는 역모로 귀양 가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즉 공이 있는 자는 차남과 십이남, 십사남, 십오남 만이 친왕의 대우를 받았을 뿐 나머지는 일반 신하와 마찬가지였다는 셈이다.

과거 진(晉)나라 무제 사마염(武帝 司馬炎)는 황제가 되자 팔촌까지 제후왕에 봉해서 나중엔 그 사마씨 자손들 모두가 제후왕(諸侯王)이 되자 서로 황제가 되겠다고 싸우다 “팔왕(八王)의 난”까지 벌려 천하를 잃어버린 어이없는 한족의 예와는 달리 만주족은 그런 분야에선 질적으로 달랐다. 태종도 황제가 되면서 형제들 중에 가장 능력 있는 14자인 예친왕을 어린 아들의 섭정으로 지명한 걸 보면 이 만주족의 황제들은 사람 보는 눈이 있었던 모양이다.

친왕(親王)이란 황제의 아들들이나 손자에게 주는 직위로 황제 다음의 최고 작위였고 만주족의 독특한 작위인 패륵(貝勒)은 만주족 전통인 왕자들의 경칭으로 일종의 작위였지만 보통 친왕 아랫 직위를 뜻했다.

1643년 태종이 51세로 죽으면서 11명의 아들들 가운데 어머니의 신분이 가장 높은 아홉 번째 아들 복림(福臨)을 후계자로 지명한다. 이가 세조 순치제인데 즉위하면서 태종의 유언으로 다른 사촌형제인 정친왕(鄭親王)과 함께 보정왕(輔政王)으로서 섭정하는데 이 것은 고대 주공과 소공의 예를 본 따 실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친동생인 예친왕이 점점 실력을 키워 나갔고 나중엔 혼자 실력자가 된다.
섭정으로서 능력을 발휘하는 건 오삼계가 명나라를 멸망시킨 이자성을 죽이려고 청나라에 도움을 청하자 이를 순순히 받아들여 돕는다는 명목으로 산해관을 넘는 대작전을 실행하면서 부터였다.

당시 명나라의 의종(毅宗)은 이자성의 반란에 스스로 자결해버리고 자금성은 이자성의 손에 들어가는데 이 이자성의 부하들이 공을 나누면서 오삼계의 애첩까지 손에 넣으면서 오삼계는 분노하게 된다. 산해관을 지키는 오삼계는 이 분노를 청나라에게 도움을 청해 복수극을 펼치고자 베이징으로 진격하는데 이 한 개인의 여자에 대한 옥심으로 청나라는 천해의 요새 산해관을 아무런 댓가 없이 넘어서게 되고 드디어 운명적인 중원의 정복을 이루게 된다.

예친왕은 고대의 주공처럼 사심없이 일을 처리하는데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하였고 강력한 만주의 8기(八騎)를 앞세워 주인 없는 천하를 차지하게 되는데 그의 공로는 청나라를 중흥시킨 것보다 더 컷다.
그 공로로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도 얻게 되지만 38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사망함으로서 7년간의 섭정시간을 마무리 하지만 이 짧은 7년이 청나라가 중국을 300여 년간 통치하는 기반이 된다.

예친왕이 죽고 나자마자 주변의 여러 사람들은 마구 그를 음해하고 공을 내리 깎어 버리는데 예친왕을 모함하는 가장 이유거리는 그가 스스로 어린 황제를 몰아내고 스스로 황제가 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귀가 얇은 세조는 당장 모든 관직을 빼앗아 버리고 종실(宗室)의 이름에서 빼버리는 극단적 조치를 취하는데 예친왕은 자녀 없이 죽어 후손이 없었다.

이렇게 죽자마자 그가 청나라에 바친 공로는 사라져 버리지만 나중에 성군(聖君)으로 이름 높던 손자뻘인 성조 강희제(聖祖 康熙帝)는 다이곤이 이용한 오삼계의 난을 평정한 후 청나라의 건국에 공이 가장 큰 사람은 다이곤이라 칭송하였고, 성조의 손자 고종 건륭제(高宗 乾隆帝)가 비로소 왕작을 회복시켜 주고 시호를 충(忠)이라 하여 태묘(太廟)에 배향하면서 성종의황제(成宗義皇帝)으로 추존(追尊)해 준다.
그리고 복작 후 30여년이 지나서 은전을 베푸는데 예친왕이 자식 없이 죽었기에 형인 다댁(多澤)의 5자 다이박(多爾博)을 양자(養子)로 삼아 그 자손들이 예친왕의 봉작을 세습하도록 조치해 주는데 그 첫 사례로 다이박의 차남 소이발(蘇爾發)이 세습 예친왕이 되었다.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하는 데는 이 예친왕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당시 황제인 순치제는 너무 어려 집정할 상태가 못 되었고, 다른 한족 황실의 예와는 달리 예친왕은 숙부로서 사심 없이 황제를 도와 베이징을 점령하여 도읍을 옮겨 훗날의 대청제국을 이루어놓는 실질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청나라의 주공(周公)이 아닐까?

원래 인간의 일반적 감성으로는 황제의 지친(至親)이 권력을 지니면 간단히 그 권력으로 스스로가 차지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그 예외가 고대 주나라의 주공으로 공자가 칭송하여 성인이라 우러러 보았고 뒷날 역사서에서 주공의 예를 찾아 비교되는 사람은 역사에서 대단한 존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청나라도 초기 이런 예친왕 도르곤처럼 고대 주공과 같은 인물이 나와, 결국 중국 역사상 초강대국인 대청제국을 이루어 주었고 이 나라를 통치한 만주족 출신의 황제들은 다른 수 백명의 한족 출신황제보다도 더 뛰어난 위대성을 보여주었다고 한족출신인 중국인들조차도 솔직히 평가내리곤 한단다.

특히 인상 깊은 것은 중국무협소설의 대가 김용(金庸)도 역사를 참조하여 작품을 쓰는데 ‘만주족 출신 황제가 자신과 같은 한족 출신의 황제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것에 대해 항상 느끼고 있다’라고 인터뷰한 글을 보면서 중국 무협소설만 읽을게 아니라 만주족의 천하경영에 대한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조선의 어느 누구는 어머니가 같은 친형님의 아들도 잔인하게 죽여 버리고 찬탈해버리는데 그래놓고도 위대하다고 祖자 붙이는 수준 낮은 인간들하고는 질적으로 달라서, 누구는 대륙을 차지하고 누구는 반도 밖에 차지 못하는 것인지 역사가 평가해줄 일이다.

중국 각 지역별 특성

푸젠성 (복건성)

티아완과 마주보고 있는 중국 남동부의 성. 민난화라는 방언을 사용한다.

산둥성

한국과 제일 가까운 곳. 청도가 위치한 성. 한국 화교 1세대는 대부분 산둥성 출신. 공자의 고향.

시안시

중국의 여러 도시 중에서 특히 유서깊은 곳.

상하이

중국에서도 여성의 지위가 제일 높은 곳

광둥성

중국 대륙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곳. 성도는 광저우이며 홍콩과 인접한 선전도 잘 알려진 도시. 화웨이 본사가 광동성 선전시에 위치한다.

항저우

상하이 남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중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지역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항저우 서호 인근의 차는 롱징차라고 하는 1kg에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중국에서 가장비싼 차이다. 알리바바 본사가 항저우에 위치한다.